나보다 빠듯한 상대를 만나면
나보다 빠듯한 상대를 만나면
2020년 12월 4일
지난 일요일, 자가격리가 풀림과 동시에 가장 급했던 용무를 처리하러 길을 나섰다. 오랜 시간 함께했고 이제 이 관계가 병적이라는 것쯤은 알지만 떼어낼 수 없는 포스트잇 커플 마냥 몇 년간 해약을 미뤄뒀던 구 통신사를 청산한 직후였다. (이름처럼 '신사'답길 바라지만, 이 도시의 '통신사'는 구 남친보다도 악랄하다.) 그래서 새로운 통신사와의 계약을 위해 유라쿠쵸의 빅 카메라를 향했고, 내가 찾아간 창구에는 아니나 다를까 ‘새로운’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그가 있었다. S는 적당한 키에 새하얀 피부, 마스크를 꼈어도 상상 가능할 반듯한 외모로 남을 돕다는 뜻을 가진 이름의 일본인 남성이었다.
그런 그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눈 지 10분 채 지나지 않아 나의 서류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자신의 통신사 이외에 누락 서류 없이도 계약이 가능한 곳을 알아봐 주겠다며 성심성의껏 액션을 취하였다. 물론 그것는 좋은 ‘직원’으로서의 행동이었을 것이나, 연애에서도 상대와 맞춰나가고 베스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만한 재목으로 봐버린 순간이었다. 그리고 몇 분이 흘러, 고마운 S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는 다음에 다시 찾아와 달라며 필요한 서류의 재확인을 위한 메모를 남긴 명함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도 영업부에 있어봤으니 영업 수단과 사심 정도는 헷갈리지 않는다. 건 수를 올리기 위한 노력의 제스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와 계속 그를 떠올렸다. S… 유니폼을 벗은 그는 어떤 사람일까. 일단 아르바이트생일까 정사원일까. 대학은 졸업했을까 아니면 교내의 유명한 CC커플일까. 1여 년 만에 잠들어 있던 내 연애 호기심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를 궁금해하고 떠올리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나는 이런 기분을 떨치려는 듯 재빨리 구글에 검색해보았다. L회사의 통신 대리점 직원의 채용 공고, 세부적인 연봉과 복리후생 등등. 슬픈 예상과 맞아떨어지는 고졸부터 가능한 조건에 초봉이 210만 원부터 시작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뭐. 상대방은 나와 아무것도 아닌 사이인데 뭐가 달라지나를 생각하면 아주 우스운 꼴이다.
자신보다 풍족한 상대를 만나야 편안하다는 말을 전래동화보다도 더 어릴 적부터 전해 들어왔다. 또한 이 도시에 오고 난 후, 나보다 빠듯한 상대를 만나면, 행복은 자격지심으로 변해 사랑마저 빼앗아 간다는 것쯤은 몇 번이고 반복했던 일이었다.
오늘 만난 그를 생각하면 사실 조금은 떨린다. 21살 때의 나처럼 금방이라도 달려가 손수적은 편지를 전해주고 싶고 그게 너무 촌스럽다면 그저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말하고 싶다. 아니, 방법은 상관없으니 내일이라도 찾아가 내가 느낀 감정을 그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그의 조건들은 내게 움직이지 말라고 말한다. 내 마음을 따르기엔, 그러기엔 내가 너무나도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