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아울렛에서 다시 만난 운명의 옷이나 가방 하물며 액세서리 키링처럼
마치 아울렛에서 다시 만난 운명의 옷이나 가방 하물며 액세서리 키링처럼
2021년 4월 18일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것엔 여러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 영화 ‘러브 로지’처럼 오랜 시간 친구였던 두 사람이 서로의 삶에 스며들어 연인이 된다. 혹은 ‘더 노트북’처럼 처음 만난 순간 두 사람이 불꽃 튀는 하룻밤에 인생을 걸겠노라 맹세하기도 한다. 천천히 혹은 빠르게 운명의 상대를 만나 평생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곧 연애이자 사랑이다.
교환 유학 시절 만난 J, 그를 알고 지낸지도 어느덧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텍사스 오스틴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정신 못 차리며 활활 타오르는 청춘의 시간을 보내던 그때 나는, 22살의 여름을 만끽하고 있었다. 오랜 일본 생활에 지쳐있던 시기에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유학을 떠나는 것은 꽤나 부담스러운 결정이었는데, 돌이켜보면 감히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라 말할 수 있겠다.
텍사스 대학교엔 아시아계의 재학생 그리고 나와 같은 수많은 유학생들이 있었다. 노드스트롬 백화점의 쇼윈도우처럼 무지개 색깔만큼이나 다양하고 매력적인 남성들도 존재했다. 사실 J를 만나기 전 이미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Z와 데이트를 시작했었는데, 그의 초록빛 눈동자를 거부할 수 있는 여성은 적어도 텍사스 땅엔 없었을 거라 믿는다.
Z와의 데이트가 끝나고 블록으로 돌아가 신발을 신은 채 커다란 소파에 몸을 파묻은 그때였다. 징-. Z를 소개해준 H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H는 나와 같은 시기에 한국에서 교환 유학을 온 여성으로 교내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후 둘도 없는 절친이 되었다. (그녀의 말을 빌려 정확한 표현을 전하자면 우린 ‘절친’보다도 ‘영혼의 쌍두마차’라 그랬다.) 그녀에게서 온 메시지는, 마침 한국 소재의 대학교에서 온 유학생들끼리 만남의 자리가 생겼으니 와보지 않겠냐는 초대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고 살았던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국인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기회. 살짝 머리를 고쳐 묶은 채 다시 밤거리로 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내 친구 H를 포함한 한국 유학생들이 여느 블록의 키친 테이블 한가득 모여 있었다. 이미 술판이 벌어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기소개를 했다.
“일본에서 살았던 터라 한국 대학생 문화는 잘 모르지만... 무튼 제 이름은 Y예요. 한국에선 남쪽 지방 출신이고요.”
입술을 닫은 그 순간 눈이 마주친 건 대각선에 앉은 깔끔한 룩스의 남성이었는데, 바로 그가 J였다.
어떻게 블록으로 돌아간 건지도 기억나지 않는 밤을 넘어 며칠이 지났다. 절친 H와 식사를 하고 난 후엔 Z와 밤거리를 누비며 사랑을 나누는 게 일상이 되어갔다.
내가 있는 곳은 밤 10시 57분, J가 있는 곳은 아침 8시 57분.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에 달라진 게 있다면 Z의 연락을 기다리는 대신 J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것이었고, 달라지지 않은 것은 H와 여전히 절친한 사이라는 것이었다. J와 나는 다른 시차 속에서도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하루를 시작하고 그가 하루를 마무리할 때까지… 우리의 거리 따위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보이스톡을 켜 둔 채 살곤 했다. (국경 없는 카톡은 물론, 마침 에어 팟이라는 게 발매되어 아주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한 달, 두 달, 그리고 6개월이 지나도 그의 다정함은 여전했고 이제는 우리의 사이를 명확히 해야 할 때가 왔음을 느끼고 있었다.
일본으로 귀국 후 그 시간 동안, J와 연락하며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지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이게 사랑인지 우정인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그와의 연애를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정말 그를 좋아하고 있다면, 여전히 이 관계를 질질 끌고 있는 내 자신이 이해가 안 돼. 나는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닐지도 몰라. 나는 쇼핑을 할 때도 마음에 들면 바로 사버리고 말지. 이월 상품이 되도록 내버려 두진 않는다고.’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이 그 당시의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결국 나의 두서없는 마음과 두려운 생각들에 그를 밀어내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이렇게 좋은 남자를 지금 바로 사귀어 버리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 헤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관계의 정의 앞에 모든 것이 복잡하게 느껴졌다.
사랑 그리고 사람은 쇼핑 리스트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마치 아울렛에서 다시 만난 운명의 옷이나 가방 하물며 액세서리 키링처럼… 만약 내게도 J와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다시는 그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Outlet(아웃렛)의 표기가 '아울렛'으로 자리잡았기에, 글의 제목과 내용 모두 '아울렛'으로 통일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