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도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 타이밍을 엮고 또 엮어 #1
단 한 번도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 타이밍을 엮고 또 엮어 #1
2021년 12월 30일
웬일로 그에게서 라인이 도착했다. 라인을 열어보니 뜻밖의 문구였다. [부재중 통화 1건] ‘부재중 전화? 잘못 걸었나?’ 그냥 무시할까 생각하면서도 이게 잘못 건 전화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일이야? 잘 못 걸었어?] 지나치게 반가운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 대뜸 그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는데 “안녕? 잘 지내?” “응, 나야 잘 지내지!... 그나저나 전화 잘못 건 거야?” “아, 응. 아까는 잘 못 걸었어. 근데 지금은 일부러 건 거야! 잘못 걸었다는 말하려고 다시 걸었어.” 이런 귀여운 핑계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런 능구렁이 같은 대사의 주인공은 나의 가장 오랜 남사친 J였다. (J라는 이니셜이 자주 등장하는 듯하지만 이는 모두 다른 사람이다.) J는 많은 일본인이 동경하는 영국 혼혈로, 갈색 머리에 크고 선한 눈매를 가진 부드러운 인상의 남성이다. 내가 그를 기숙사에서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정말 단순하게 ‘잘생겼다’ 였는데, 몇 년이 흘러 2017년 여름에 개봉한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본 이후에야 그가 톰 홀랜드와 닮은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나의 최애 히어로가 스파이더맨이었기에 나의 남사친이 피터 파커 재질의 남성이라는 걸 알았을 땐 진심으로 뿌듯했다.
J는 입학과 동시에 알고 지낸 기숙사 메이트의 한 다리 건넌 친구였다. 전혀 겹칠 일 없을 것 같던 그와는 4월 개강 후 바로 영어 클래스에서 만나게 되는데,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계기였다. 우리 학교는 매년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교내 시험을 통해 레벨에 따라 나눠져 졸업 필수 과목인 언어(영어, 일본어)를 수강할 수 있었다. 나와 J는 수많은 확률을 뚫고 다른 클래스보다 소규모로 진행한 최상급 레벨에 배정되어 더욱이 친해질 수 있었다. 심지어는 둘 다 재수강을 해야 했던 시기마저 겹쳤기에 주 4회씩이던 영어에 한해서는 완전히 일치한 2년을 함께 보낸 것이다. (그 많은 교수님과 레벨 클래스 속에서 똑같은 확률이 맞아떨어진 건 굉장히 신기하다. 총 맞은 F학점의 타이밍까지도 큭큭.) 사실 남사친 J와의 이야기는 매번 쓸까 말까 고민하다 다음에 쓰자며 미루게 되는 주제였다. 그와는 아직 확실하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적도, 매듭지어본 적도 없는데… 이걸 내 시선에서 멋대로 적어 내려가도 될지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둘 사이엔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 때문에 섣불리 결론을 지을 수 없었던 이유도 있다.
나와 그 사이에는 처음부터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스파이더맨의 팅글과 같은 ‘찌리릿’이 존재한다. 옛날 노래로 치면 사랑보다 멀지만 우정보다는 가까운 그런 거? 그럼에도 둘 사이를 발전시키지 못했던 건 우리가 각자의 연인이 있었다는 게 이유였고, 내가 싱글일 때도 그것이 이유가 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J에겐 내가 그와 알기 직전부터 사귀기 시작한 오랜 여자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J의 여자친구였던 A는 굉장히 시원시원한 여장부 스타일의 여성이었기에 나는 그의 이상형과 거리가 멀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싱글이었던 여느 학기엔, 매주 화요일이면 자신의 여자친구가 아닌 나를 찾아와 카페테리아에서 함께 석식을 먹었다. 그러고 나선 내게 저녁 동아리 활동이 있는걸 알기에 자연스레 연습실 앞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서던 J였다. 그는 그 루틴을 내가 허락하는 선에서 한동안 유지했는데, 그 날들의 우리가 나눈 대화도 거의 같은 루틴의 것이었다. 영어 클래스 이야기, 내 연애 근황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에 대한 불만 같은 것들. “난 너랑 일주일 중 한 번은 꼭 만날 수 있어서 기뻐. 하지만 내가 너의 여자친구라면 결코 달갑지 않을 거야.” “내 여자 친구는 이런 거 신경도 안 써. 나보다 남사친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그녀야. 그저 좋은 거리감에서 잘 사귀기만 하면 내가 뭘 하든 신경 안 쓴대. 오픈 릴레이션십, 그게 말이 되니?” 그의 여자친구 A와 불안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것쯤은 주변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고, 내게 투정 부리며 연애 고충을 털어놓던 그에게서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J가 곧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연애를 하고 있다고 한들, 운명의 상대 따위를 믿는 나에겐 그와 함께하는 모든 상황이 늘 편안할 수만은 없었다. 그가 아무리 멋진 남성일지라도 운명의 상대는 모두에게 공평히 한 명이니까, 두 명씩이나 존재하는 게 아닐 테니까. 그저 친구 사이의 선을 넘지 않도록 손을 잡거나 집에 돌아간 후의 전화 같은 건 하고 싶어도 꾹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우리가 첫 데이트를 하긴 했었는데, 그게 벌써 3년 전 이맘때의 일이었다. 남사친과 단 둘이 하루를 보내는 일은 용서되지 않았던 내가 처음으로 용기 내 캠퍼스 밖에서 그를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