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 in Korea/사랑, 남자들

그는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날 좋아하지 않아

로즈마카롱 2022. 8. 2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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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날 좋아하지 않아

 

2022년 3월 30일

“말도 안 돼.”

  문학에선 도라지 꽃의 보라색이 새드 엔딩의 복선이라 했던가. 오랜만에 한 보라색 네일이 이를 속히 증명이라도 하듯 말도 안 되는 일이 터졌다. 굳이 점심시간을 써서 전화한 그의 입에서 나온 대사는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시작됐다, 그놈의 오픈 릴레이션십 타령이.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오피셜로 한 게 네가 이 도시를 떠난 이후라는 게 너무 속상해. 조금 더 빨리 닿았으면 좋았을걸…” 며칠 전만 해도,“이제라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좋아해.”라고 말했던 그였다. 그런데 “만약 널 만날 수 없어서 외로워지면 어쩌지? 지금 한/일 비자가 막혀 있으니 각자의 나라에서 만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고. 견디기 힘들어지면… 오픈 릴레이션십도 생각할 수 있을까?” 이딴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다. (강한 단어로 표현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게 개소리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오랜 시간 동안 지속한 오픈 릴레이션 십에 지쳐 버린 그는, 내 상상 이상으로 전 여자 친구와의 연애 방식에 젖어 있었다. “처음으로, 지금까진 믿지 못했던 결혼이 당장에 하고 싶고 평생을 함께 걸어가고 싶은 사람이 명확해진 거 같아서 행복해.” 라던 그의 말이 내 마음속 소나기처럼 우수수 퍼부어지다 실망만을 남기고 그쳐버렸다. 애초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 저딴 말을 쉽게도 내뱉는 그가 미웠다. 전 여자 친구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라기 보다, ‘나’라는 여성에 만족하지 못할 미래의 자신에 대한 염려 같은 것이 느껴져 짜증이 확 났다. 자존심이 팍 상했다. 그런 짓을 저지를 것이라는 뜻도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뜻도 아니었지만. 순수한 마음과 소년 소녀 (단 한 명씩!) 만이 필요한 연애 소설 속에 굳이 상식 밖의 복선이 필요하냐 말이다.

“너랑 재회하기 전 싱글일 때 유난히 잘 지낸 여자 후배가 있어. 연애 감정은 없으니 지금도 그냥 친한 사이인 거고. 조만간 둘이 식사라도 갈까 싶은데, 어쨌든 여자 친구 의견을 묻고 정하고 싶다고 했거든.” “지금 네가 말하는 건 단순히 후배랑, 여자 후배지만, 아무튼 밥 한 끼 하고 싶다는 건데. 왜? 왜, 오픈 릴레이션십으로 운을 떼는 건지 설명해줄래?” “아, 그러게. 음… 남녀 사이에도 친구는 존재하는 거니까. 단지 그런 게 허용될까 알고 싶었어.” 그 순간 유달리 발달한 나의 복선 찾기 감각이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래? 음. 그냥 연애였다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장거리 중이고 네 입에선 결혼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마당에… 여자 친구보다 더 자주 만나는 이성이 있다는 건,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해. 우리 사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일지도 몰라. 괜찮으면 오늘 저녁에 다시 전화하자. 네 점심시간을 이런 이야기로 끝낼 순 없으니.” 몇 년 전 그와 첫 데이트에서 돌아오던 밤, 급하게 닫아버린 와인색 자동차 문처럼 허둥지둥 보라색 제트 플립을 닫아 끊어버렸다. (불 난 집에 복선을 깔아주듯 내 휴대폰마저 보라색이라니!)

  내가 상상했던 25살의 마지막 연애는 이런 식으로 흘러갈 예정이 아니었는데. 어른이 되면 그전까지 몰랐던 새로운 상식들이 늘어날 수는 있지만… 이 더러운 기분의 원인은 그저 상식 밖의 것이었다. 나와 매일 전화하고 사진과 메시지를 주고받아도, 그의 머릿속 한편엔 그딴 이중적인 버릇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거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날 좋아하지 않아.’라는 생각이 들자 어버버, 우리의 사랑에 버, 버, 버퍼링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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