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타라레바 아가씨
2022년 4월 4일
그 도시를 떠나온 이후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껏 어디에도 쓰진 않았지만, 나는 도쿄를 떠났고 도쿄는 그런 나를 떠나보냈다. 도쿄 타워가 훤히 보이던 도심 공원 속 오피스, 에비스의 갈색 건물과 어울리는 노을 진풍경, 시부야의 어수선한 교차로 위 흘러나오는 케이팝 가수의 일본어 노래, 돔 시티의 관람차에서 내려다보던 반짝이는 우리 동네 같은 것들… 마치 아직 몇 년은 더 유효한 20대를 전부 내려놓고 돌아온 듯한 외로움 그리고 이에 부채질이라도 하듯 하루 만에 늘어난 한국식 나이까지(25살에서 갑자기 27살이 된 기분이란!), 불안감이 엄습했다.
한국은 텅 빈 내 마음속 후회 망상만 가득히 채워주는 것 같았다.
“아, 라뒤레 가고 싶어. 로즈 마카롱 먹고 싶어… 도쿄에만 남아 있었다면 마카롱 하나쯤 금방 사 먹었을 텐데.”
이런 소소한 후회 망상부터,
“내가 T 선배랑 잘 되어서 결혼했으면 애가 적어도 둘은 있는 유부녀가 되었을 텐데! 데이트에 좀 더 응해줄 걸 그랬나?” 와 같은 인생을 건 후회 망상이 몽글몽글하다.
나의 터전을 떠나왔다는 후회와 진정으로 맺어지지 못한 인연에 대한 망상. 이를 더 나은 것으로 바꿔 보겠노라 마음먹고 돌아온 한국인데… 새 도시이자 고향인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후회 망상이라는 말부터 좀 떨쳐낼 필요가 있는 걸까.
2017년 드라마 도쿄 타라레바 아가씨에선, 우리가 타라레바(~タラ, ~レバ)를 생각하고 말로 뱉음으로써 비로소 지금 느끼는 행복 비스름한 것에 가까워진 거라고 했다. 주인공 린코와 단짝 친구 카오리, 코유키는 그녀들이 꿈꿔온 30대와는 전혀 다른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고, 끝날 줄 모르는 기나긴 연애 공백과 틈만 나면 위태로워지는 커리어에 평범마저도 손에 쥐기 힘들어 보였다. 린코는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8년 전 자신에게 고백했던 직장 선배를 받아주겠다는 말을 매회 반복한다. 한편으로, 나이도 직업도 게다가 이름도 모르는 금발 머리의 등장에 마음을 뺏기고 마는데, 그를 향한 감정은 단순한 호기심일 뿐 호감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결국, 직장 선배와 맺어질 타이밍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또 후회 망상하게 될지도 모르지만’이라며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금발 머리에게 고백한다.
즉 ‘~했으면’, ‘~였다면’과 같은 후회 망상을 매일 같이 되풀이하는 우리이지만,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고 그 시절의 ‘그’는 지금의 나를 위한 최고의 연인이 아니었음을 믿어야 한다. 진짜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나 소중한 사랑을 저버린 후의 망상이었다면, 지금처럼 속 편히 타라레바 하소연도 못 할 테니까 말이다. 이는 도쿄 타라레바 아가씨가 5년도 더 지난 작품이라도 여전히 해당하는 연애 교훈이라 생각한다.
“지금 이 일을 놓아버리고 몇 년 뒤, 아니 곧장 며칠 뒤엔 후회하겠지? 그러다 다시 무언가에 도전하려 마음먹었을 때, 너무 늦었다고 생각되면 어쩌지?”
이 단골 멘트를 몇 년 더 안고 갈지라도…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잘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간극을 좁혀보려 무엇이든 실천한다면, 그 끝엔 길이 보일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쿄를 쏘다니며 고객을 상대하던 대기업 사원이 한국으로 돌아와 독립출판을 위해 책을 쓰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출판이 출세보다 어렵게 느껴지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써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만족스러운 책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좋은 사람인데, 도저히 연애 상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바보인 걸까? 사귀다 보면 좋아진다는 말은 나만 못 믿는 거지?”
이 단골 멘트를 몇 년 더 안고 갈지라도… 나에게 잘해주는 남성이기만 하면 다른 것은 따지지 말고 일단 만나보기나 하라는 주변의 잡음에 약해지지 않는다면, 그 끝엔 운명의 단 한 사람이 서 있을 것이다.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고집스러운 연애관이 주변 사람들 눈엔 답답하다 못해 안타까워 보인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 이는 연애나 결혼 이전에 가장 중요한 사랑이 아닌가? 과거의 연애에서 배운 교훈이 진리는 아니지만,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지키며 사랑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다운 연애와 진실한 행복을 만끽할 날이 올 것이다.
도쿄 아가씨, 아니 당분간은 한국 아가씨, 후회 망상도 즐겁게 되돌려 놓아 보겠어!
*타라레바(タラレバ): ‘만약 ~ 하면/했다면’의 일본어 가정 표현으로, 원작 만화 ‘도쿄 타라레바 아가씨’의 한국어판이 ‘도쿄 후회 망상 아가씨’라 번역되었음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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