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그려온 내 이상의 남성
2021년 7월 25일
지난 몇 년간의 관계를 마무리 짓기 위해 걸었던 J와의 통화에서 이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타인이 나를 정의할 때 내가 가장 듣기 두려워하는 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 믿어. 너는 뭐랄까… 그냥 좀 알 수 없는 사람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해주면 좋아하겠구나, 저렇게 해주면 기뻐해 주겠구나, 생각해서 행동으로 옮겨도 딱 맞아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부작용만 일으키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 믿는다는 가스라이팅에 금방이라도 아니라 부정하고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러려니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이 정도면 그게 어떤 말인지 눈치챘을 거로 생각한다.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 사실 연인뿐만 아니라 진정한 친구가 되지 못 한 사람들에게도 몇 번 들어왔던 말이었다. 그런데도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상처받는 건, 15살의 소녀였던 때도 25살의 다 큰 성인이 된 지금도 그대로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J와 대화를 끝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내가 지금껏 들어왔던 말들을 나열해보자면, ‘알 수 없는 사람’ 이 외에도 ‘자기 세상이 확고한 사람’, ‘한 가지에 푹 빠져드는 사람’, ‘시대에 맞지 않게 교양을 고집하는 사람’, ‘착해 보이지만 왠지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 그리고 ‘마음먹은 것을 무서울 정도의 노력으로 습관화시킬 줄 아는 사람’ 등이 있었다. 작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성격유형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INFJ 그 자체다. 칭찬인 듯 아닌 듯 모호한 말들을 곱씹어보니 한 가지 뜻밖의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나는, 내가 항상 그려온 ‘내 이상의 남성’이라는 사실이었다.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자꾸 생각나고 더 알아가고 싶게 호기심을 유발하는 남성, ‘자기 세상이 확고한 사람’이라 개성적이고 뚜렷한 색깔을 느낄 수 있는 남성, ‘한 가지에 푹 빠져드는 사람’이라 연애에서도 일편단심 신뢰할 수 있는 남성, ‘시대에 맞지 않게 교양을 고집하는 사람’이라 갑갑해 보이는 면은 있을지라도 예의 바르고 심지가 올곧은 남성, ‘착해 보이지만 왠지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라 조심스럽지만, 모두에게 적당한 선을 그을 줄 아는 남성 그리고 ‘마음먹은 것을 무서울 정도의 노력으로 습관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라 목표 지향적이고 자기 계발에 꾸준한 남성, 그런 내 ‘이상형’의 남성!
언젠가 내가 그리는 운명의 남성과 어울릴만한 여성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던 것을, 이런 형태로 깨닫게 될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운명이라는 말 앞에, 이러한 노력이 결코 나약한 것이라고 해도, 나 자신이 영영 닿을 수 없는 이상의 남자를 좇는 것처럼 느끼지 않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온 것이다.
단지 J에게로부터, 아니 어쩌면 연애 감정이란 걸 자각한 소녀 시절부터, 모두에게서 들어왔던 트라우마 같은 말일 뿐인데… 처음으로 미소를 지은 채 납득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가 나의 이상형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구나. 나는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마치 감탄사처럼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해보니 정말로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타인이 보는 ‘나’는 그들의 ‘이상’적인 사람이 아닐지라도 괜찮다. 모두가 각자의 빛나는 이상향을 품고 따르고 있기에, 우리는 다르고 비슷하기도 하며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예상 밖에 벗어나는 ‘알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만약 ‘알기 쉬운 사람’ 혹은 ‘뻔한 사람’이었다면 J를 얻을 순 있었겠지만,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나 자신을 사랑할 순 없었겠지. 어쩌면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겠지.
“나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런 사람일 것이고 나와 닮은 그런 사람을 만나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싶으니까, 나는 계속해서 그런 사랑을 꿈 꿀 거니까!”
모든 말이 다 괜찮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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