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부터 나와 맞지 않는 모양의 열쇠
2021년 3월 1일
내가 신입사원으로 열심히 일하던 그해의 봄과 여름을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냈던 선배가 있었다. R은 간사이 출신답게 건강한 색의 피부와 고양이 같이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남성이었다. 그와는 내가 오사카에서 연수를 마치고 도쿄 지사로 발령 난 직후인 5월부터 7월까지를 거의 한 몸처럼 일해야 했으며, 패션과 연예 이야기 (어쩐지 연애 이야기보다 연예 이야기가 더 잘 맞았다) 등 공통 관심사가 꽤 많았기에 금방 특별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친구 혹은 연인 사이에도 매일 연락하는 게 집요하게 느껴지고 매주 만나는 게 버거운 일본 남녀에게 특별한 사이란, 그와 내가 서로를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대표적인 힌트였다. 한국이라면 당연했을 퇴근길의 라인 메시지 한 통마저 이 도시, 도쿄에서는 꽤 특별한 사이임을 대변해주는 신호였다.
퇴근 후, R의 맨션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때였다. 갑작스러운 부서에서의 부름으로 그가 다시 회사에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나 혼자 어쩌지…’
어찌할 바를 몰라 애꿎은 숟가락만 바라보고 있었더니 그런 나를 보고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 서랍장을 뒤지는 그였다. 그리고 그가 찾아낸 것은 뜻밖의 것이었는데, 무려 여벌의 현관 열쇠였다. (대부분의 일본 주거 건물은 여전히 열쇠를 이용한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 가져도 좋아. 혹시라도, 우리가 함께 집을 나서다 회사 사람들을 마주치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라는 말과 함께 내 손바닥에 열쇠를 올리곤 꼭 쥐여 주었다. 사회 분위기상, 일본에서의 사내 연애는 한국에서보다 더욱 비밀스럽게 지키고 싶은 것이었다…고 이해하려 했지만, 머리가 띵해졌다. 우리의 관계를 들키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여벌 키를 넘겨주는 것이 더 쉬운 일이라고? 잠시만, 이건 그린 라이트일까 혹은 레드 라이트일까. 마치 연인처럼, 우리의 관계를 더욱 특별하게 정의하겠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가 들었지만, 아무쪼록 그의 진심은 알 수 없었다.
여느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결혼을 앞둔 커플들이 자신의 현관 열쇠(혹은 비밀번호)를 공유하곤 한다. 이는 ‘나는 언제든 그의 집에 찾아갈 수 있다’는 권리의 상징이자 ‘우린 서로에게 숨길 것이 없다’는 신뢰의 증거이기도 했다. R과 나는 결혼은커녕 아직 서로의 별자리조차 알지 못하는 사이인데… 내가 아무리 일본의, 도쿄 남녀의 연애 방식에서 정의한 특별함에 익숙해졌다 한들… 오른손에 쥔 여벌의 그의 현관 열쇠가 너무나 가볍다 못해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R과 지낸 지 두어 달이 지날 즈음 내 23번째 생일을 맞이했고, 우린 그날도 그의 맨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엔 가까이 사는 회사 동기에게서 라인이 왔는데, 마침 R의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봤으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공원에 보드를 타러 가자는 연락이었다. 그까짓 연락은 무시해버리면 좋을 텐데… 나의 바람과는 달리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을 붙들곤 동기가 언제 집으로 들이닥칠지 모른다며 발을 동동 굴리는 그였다. 결국, R은 한 시간 안에 돌아올 테니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급히 보드를 챙겨 집을 나섰다.
예상대로 그날이 내가 마지막으로 R의 여벌 현관 키를 사용한 날이 되었다.
12시가 채 지나지 못한 생일 밤, 끝나지 않은 파티를 뒤로한 채 집을 향해 걷는 도쿄 돔 시티의 정원은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돔 입구에 잠가진 저 열쇠들처럼 ‘연애라는 이름의 열쇠’는 두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굳게 잠가 준다. 그 누구도 열 수 없게끔 단단히 사랑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나와 맞지 않는 모양의 열쇠라면, 그게 얼마나 특별한 모양을 하고 있던지는 아무래도 소용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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